이고르 스트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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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71년 미국에서 사망한 작곡가이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의 협업을 통해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등 혁신적인 발레 음악을 작곡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원시주의, 신고전주의, 음렬주의 등 다양한 작풍을 시도했으며,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곡, 합창곡, 가곡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1959년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전통 예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당시 무명이었던 다케미쓰 도루의 작품을 극찬하여 그의 음악적 성장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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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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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원어 이름 | Игорь Стравинский |
로마자 표기 | Igor' Fyodorovich Stravinskiy |
출생일 | 1882년 6월 17일 |
출생지 | 러시아 로모노소프 |
사망일 | 1971년 4월 6일 |
사망지 | 미국 뉴욕 |
국적 | 러시아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
배우자 | 예카테리나 노센코 (1906년 1월 24일 결혼, 1939년 3월 2일 사망) 베라 드 보세 (1940년 3월 9일 결혼) |
자녀 | 4명 (테오도르 스트라빈스키, 술리마 스트라빈스키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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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스타일 | |
장르 | 원시주의 신고전주의 음악 세리주의 |
주요 작품 | |
작품 목록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목록 |
대표 작품 | 봄의 제전 페트루슈카 불새 결혼 병사의 이야기 아폴론 무사게테스 칸티쿰 사크룸 |
음반 정보 | |
악기 | |
연주 악기 | 피아노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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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고르 표도로비치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6월 17일(율리우스력 6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핀란드만 남부 해안의 오라니엔바움(현재는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 표도르 이그나티에비치 스트라빈스키(1843-1902)는 키예프 오페라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베이스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다.[6] 어머니 안나 키릴로브나 스트라빈스카야(1854-1939)는 키예프 태생으로, 키예프 재산부 고위 관리의 네 딸 중 하나였다. 이고르는 네 아들 중 셋째였다.[4] 스트라빈스키 가문은 폴란드계 소귀족 가문으로, 그들의 영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있었지만 점차 몰락해 갔다. "스트라빈스키"라는 성은 폴란드 동부 스트라바 강(Strėva River)에서 유래했다.[5]
스트라빈스키는 학교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혐오감을 표현하고 외로운 학생이었던 것을 회상했다. 아홉 살 때부터 개인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부모는 그에게 음악적 재능이 없다고 여겼다.[9]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를 기대했다.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형법과 법철학을 공부했지만, 강의 참석은 선택 사항이었고 4년 동안 공부한 시간이 50개 미만이었다.[7][8] 1902년 스트라빈스키는 대학 동료이자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를 만났다. 스트라빈스키는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를 만나 음악적 열망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1902년 여름,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그의 가족과 함께 보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지 말고 개인 교습을 계속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0]
1902년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할 무렵, 스트라빈스키는 법보다 음악을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이후 두 달 동안 대학이 문을 닫히면서 최종 법률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12] 1906년 4월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집중했다. 1905년에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를 제2의 아버지로 여기게 되었다. 이 수업은 1908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1]
1905년 8월, 스트라빈스키는 사촌누나 카테리나 가브릴로브나 노센코(1880~)와 약혼했다. 정교회의 사촌간 결혼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06년 1월 23일에 결혼했다.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1910년 시즌을 위해 파리에서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를 혼합한 무대를 선보이고 싶었다. 그 중 하나는 러시아 동화 '불새'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발레였다.[13] 리야도프가 악보 작곡 임무를 받은 후, 약 1년이 필요하다고 알리자, 댜길레프는 28세의 스트라빈스키에게 악보 작곡을 의뢰했다. 50분 길이의 《불새》는 1911년, 1919년 및 1945년 콘서트 공연을 위해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수정되었다.
《불새》는 1910년 6월 25일 오페라 드 파리에서 초연되어 광범위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스트라빈스키는 하룻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5][16] 9월에 그들은 스위스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가족은 1914년까지 여름은 러시아에서, 겨울은 스위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댜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1911년 파리 시즌을 위한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러시아 민화에 기반을 둔 《페트루시카》로, 다른 발레리나와 사랑에 빠지는 꼭두각시 인형이 등장한다.
비평가, 동료 작곡가, 콘서트 관객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디아길레프를 위한 세 번째 발레, 《봄의 제전》이었다. 이 프로덕션은 봄의 도래를 축하하는 일련의 원시적 의식을 특징으로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는 음조, 박자, 리듬, 강세 및 불협화음에 대한 실험을 포함하여 당대의 많은 참신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1913년 5월 29일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소란이 일어났다.[15][16]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고국으로 돌아갈수 없게 되었다.[17]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고국의 토지는 혁명 정부에 몰수되었고, 러시아로부터의 수입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며, 발레 뤼스의 공연도 전쟁으로 인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스트라빈스키의 생활은 곤경에 처했다.[18] 이 무렵 작곡된 곡으로는 러시아 민중시와 우화에 의한 토속적인 『여우』, 『결혼』, 『병사의 이야기』 등이 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7]
2. 1. 러시아 시기 (1882년 ~ 1914년)
이고르 표도로비치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6월 17일(율리우스력 6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핀란드만 남부 해안의 오라니엔바움(현재는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 표도르 이그나티에비치 스트라빈스키(1843-1902)는 키예프 오페라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베이스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다.[6] 어머니 안나 키릴로브나 스트라빈스카야(1854-1939)는 키예프 태생으로, 키예프 재산부 고위 관리의 네 딸 중 하나였다. 이고르는 네 아들 중 셋째였다.[4] 스트라빈스키 가문은 폴란드계 소귀족 가문으로, 그들의 영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있었지만 점차 몰락해 갔다. "스트라빈스키"라는 성은 폴란드 동부 스트라바 강(Strėva River)에서 유래했다.[5]
스트라빈스키는 학교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혐오감을 표현하고 외로운 학생이었던 것을 회상했다. 아홉 살 때부터 개인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부모는 그에게 음악적 재능이 없다고 여겼다.[9]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를 기대했다.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형법과 법철학을 공부했지만, 강의 참석은 선택 사항이었고 4년 동안 공부한 시간이 50개 미만이었다.[7][8] 1902년 스트라빈스키는 대학 동료이자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막내아들인 블라디미르를 만났다. 스트라빈스키는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를 만나 음악적 열망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1902년 여름,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그의 가족과 함께 보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지 말고 개인 교습을 계속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0]
1902년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할 무렵, 스트라빈스키는 법보다 음악을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이후 두 달 동안 대학이 문을 닫히면서 최종 법률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12] 1906년 4월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집중했다. 1905년에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를 제2의 아버지로 여기게 되었다. 이 수업은 1908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1]
1905년 8월, 스트라빈스키는 사촌누나 카테리나 가브릴로브나 노센코(1880~)와 약혼했다. 정교회의 사촌간 결혼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06년 1월 23일에 결혼했다.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1910년 시즌을 위해 파리에서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를 혼합한 무대를 선보이고 싶었다. 그 중 하나는 러시아 동화 '불새'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발레였다.[13] 리야도프가 악보 작곡 임무를 받은 후, 약 1년이 필요하다고 알리자, 댜길레프는 28세의 스트라빈스키에게 악보 작곡을 의뢰했다. 50분 길이의 《불새》는 1911년, 1919년 및 1945년 콘서트 공연을 위해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수정되었다.
《불새》는 1910년 6월 25일 오페라 드 파리에서 초연되어 광범위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스트라빈스키는 하룻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5][16] 9월에 그들은 스위스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가족은 1914년까지 여름은 러시아에서, 겨울은 스위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댜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1911년 파리 시즌을 위한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러시아 민화에 기반을 둔 《페트루시카》로, 다른 발레리나와 사랑에 빠지는 꼭두각시 인형이 등장한다.
비평가, 동료 작곡가, 콘서트 관객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디아길레프를 위한 세 번째 발레, 《봄의 제전》이었다. 이 프로덕션은 봄의 도래를 축하하는 일련의 원시적 의식을 특징으로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는 음조, 박자, 리듬, 강세 및 불협화음에 대한 실험을 포함하여 당대의 많은 참신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1913년 5월 29일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소란이 일어났다.[15][16]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고국으로 돌아갈수 없게 되었다.[17]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고국의 토지는 혁명 정부에 몰수되었고, 러시아로부터의 수입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며, 발레 뤼스의 공연도 전쟁으로 인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스트라빈스키의 생활은 곤경에 처했다.[18] 이 무렵 작곡된 곡으로는 러시아 민중시와 우화에 의한 토속적인 『여우』, 『결혼』, 『병사의 이야기』 등이 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7]
2. 2. 스위스 및 프랑스 시기 (1914년 ~ 1939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1920년까지 스위스에 머물렀다.[50][51] 이 시기 스트라빈스키는 모르주 등지에 거주하며, C. F. 라무즈와 협력하여 《병사 이야기》를 작곡했다.[50] 그러나 스페인 독감 유행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다.[50] 또한,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베른 협약 문제로 저작권료 수입에도 문제가 발생했다.[50]전쟁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 카랑텍으로 잠시 이주했다가,[50] 1920년 9월 코코 샤넬의 집에 머무르며 《관악기 교향곡》을 작곡했다.[50] 이후 백색 이민자들의 중심지였던 비아리츠로 이주하여 베라 드 보세와 만났고, 그녀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50]
1920년대 초, 스트라빈스키는 플레이어 피아노 회사인 플레이엘과 계약을 맺고 자신의 음악을 피아노롤로 편곡하는 작업을 했다.[50] 그는 플레이엘 공장에 스튜디오를 얻어 《》를 재편곡하기도 했다.[50]
스트라빈스키는 세르게이 댜길레프와의 관계를 통해 《풀치넬라》, 《마브라》 등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마브라》는 이전의 혁신적인 작품들과 비교되어 비평가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50] 1923년에는 《》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하고 초연했다.[50]
1924년 9월, 스트라빈스키 가족은 프랑스 니스로 이주했다. 이 시기 스트라빈스키는 종교적인 심취를 통해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되찾고, 종교적인 작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50] 그는 장 코크토(Jean Cocteau)와 협력하여 오페라-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 렉스》를 작곡했지만,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50] 이후 《》, 《요정의 키스(The Fairy's Kiss)》 등의 발레 작품을 작곡했다.[50]
1929년 세르게이 댜길레프가 사망한 후, 스트라빈스키는 사무엘 두쉬킨(Samuel Dushkin)을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함께 연주 활동을 했다.[50] 또한 미국으로부터 의뢰받은 《시편 교향곡(Symphony of Psalms)》, 《카드 놀이》, Dumbarton Oaks 등의 작품을 작곡했다.[50]
1934년,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하고[19] 파리에 거주했지만,[19] 1938년과 1939년에 걸쳐 장녀, 아내, 어머니를 연이어 잃는 슬픔을 겪었다.[20] 나치 정권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퇴폐 음악으로 규정했고,[20] 프랑스 내에서도 그의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했다.[20]
2. 3. 미국 시기 (1939년 ~ 1971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9월 하버드 대학교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좌 시리즈의 강의를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21] 1939년 10월부터 1940년 4월까지 표트르 수브친스키와 알렉시스 롤랑-마뉘엘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6회의 강의는 1941년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1947년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21][49] 강의 사이에 스트라빈스키는 C장조 교향곡을 완성하고 전국을 순회했으며, 뉴욕에서 베라 드 보세를 만났다.[49] 1940년 3월 9일 매사추세츠주 베드퍼드에서 스트라빈스키와 드 보세는 결혼식을 올렸고, 강의를 마친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다.[49]유럽에서의 저작권료 수입이 전쟁으로 중단되자, 스트라빈스키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49] 그는 여러 지휘 약속을 받았고, 폴 화이트먼을 위한 와 브로드웨이 희곡을 위한 등 상업적인 작품들을 작곡했다.[49] 일부 버려진 영화 음악은 더 큰 작품으로 편입되었는데, 전쟁에서 영감을 받은 3악장 교향곡이 그 예시이며, 그 중간 악장은 사용되지 않은 ''베르나데트의 노래''(1943)의 음악을 사용했다.[49]
스트라빈스키는 서툰 영어 실력 때문에 주로 유럽인들과 사교 모임을 가졌고, 가정 생활을 형성했다.[49] 저택 직원들은 대부분 러시아인이었고, 조셉 시게티, 아서 루빈스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음악가들이 자주 방문했다.[49]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과 어울리며 파티에 참석했고, 올더스 헉슬리, W. H. 오든,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딜런 토마스 등 유럽 작가들과 가까워졌다.[49]
1945년, 스트라빈스키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부지 & 호크스와 계약하여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많이 수정하고 새 판본을 출판하여 저작권을 갱신했다.[19][49] 1948년경, 발란신과의 협업인 발레 ''오르페우스'' 초연 무렵, 스트라빈스키는 로버트 크래프트를 만났다.[49] 크래프트는 스트라빈스키의 조수, 협력자, 비서가 되었다.[49]
스트라빈스키는 18세기 화가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 그림인 죄 많은 인생을 바탕으로 영어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49] 1947년 11월 오든과 함께 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 미국 작가 체스터 칼먼이 오든을 도왔다.[49] 1951년에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완성했지만, 자신의 새로운 음악이 젊은 작곡가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했다.[49] 크래프트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제2 빈 악파의 12음 기법을 소개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안톤 베베른과 아널드 쇤베르크의 음악을 연구하고 듣기 시작했다.[49]
1950년대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세계를 광범위하게 순회 공연을 계속했고, 가끔 작곡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49] 1953년 딜런 토마스가 사망하면서 스트라빈스키는 12음 기법을 완전히 기반으로 한 그의 첫 작품인 ''딜런 토마스를 추모하며''를 완성했다.[49] 1956년에 베니스 국제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칸타타 ''''는 로 하여금 1957년에 의 음악적 설정을 의뢰하게 했다.[49] 발란신의 발레 ''아곤''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적 주제와 12음 기법을 융합했고, ''''는 음렬 사용으로의 그의 완전한 전환을 보여주었다.[49]

1962년 1월 워싱턴 D.C.에서 순회 공연 중 스트라빈스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백악관에서 만찬에 참석하여 특별 메달을 받았다.[53][54] 1962년 9월 스트라빈스키는 소련 작곡가 연맹의 초청으로 1914년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로 돌아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6번의 공연을 펼쳤다.[55] 3주 간의 방문 기간 동안 그는 소련 수상 니키타 흐루쇼프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을 포함한 몇몇 주요 소비에트 작곡가를 만났다.[55] 1963년 존 F. 케네디가 암살된 후 스트라빈스키는 이듬해 《케네디를 위한 애가》를 완성했다.[49]
스트라빈스키는 후기 작품들에서 성경적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49] 1961년 실내 칸타타 《설교, 이야기, 기도》, 1962년 음악 텔레비전 제작 《대홍수》, 1963년 히브리어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1966년 《레퀴엠 칸티클》이 그것이다.[49]

1967년 가을, 십이지장궤양 출혈과 혈전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스트라빈스키는 1968년 국내 순회 공연에 복귀했지만(청중으로만 참석) 건강 악화로 작곡을 중단했다.[49]
말년에 스트라빈스키 부부와 크래프트는 뉴욕으로 이사했고, 작곡가의 여행은 유럽에 있는 가족 방문으로 제한되었다.[49] 레녹스 힐 병원에서 폐부종 진단을 받고 퇴원한 직후, 스트라빈스키는 아내와 함께 5번가의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했다. 작곡가는 1971년 4월 6일 88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다.[49] 사흘 후 프랭크 E. 캠벨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49] 크래프트가 지휘하는 《레퀴엠 칸티클》 연주와 함께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스트라빈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묘소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베네치아의 산 미켈레 섬 묘지에 매장되었다.[49]
3. 주요 작품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대부분은 최소한의 루바토나 비브라토를 사용하여 짧고 날카로운 악절이 특징이다. 그의 학생 시절 작품들은 주로 그의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과제였으며, 주로 러시아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세 개의 발레, ''불새'', ''페트루슈카'', 그리고 ''봄의 제전''은 그의 국제적인 명성의 시작과 19세기 스타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종종 세 가지 작곡 시대로 나뉜다. 러시아 시대(1913~1920년)는 러시아 예술가와 민속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신고전주의 시대(1920~1951년)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기법과 주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렬렬주의 시대(1954~1968년)에는 제2 빈 악파 작곡가들이 개척한 고도로 구조화된 작곡 기법을 사용했다.
'''오페라/무대 음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오페라, 발레 음악, 극음악 등 다양한 무대 음악 작품을 남겼다. 1914년에는 오페라 《밤에 우는 꾀꼬리》를 초연했으며, 1917년에는 이 작품의 주제를 사용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1918년에는 《병사 이야기》를 초연했다. 1927년에는 장 콕토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 왕》을 초연했고, 1948년에 개정했다. 1951년에는 《탕자의 방황》을 초연했다. 그 외에도 《여우》(1916), 《마브라》(1922), 《페르세포네》(1933), 《홍수》(1962) 등을 작곡했다.
'''발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과의 협업을 통해 발레 음악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1909년 2월, 스트라빈스키의 ''환상적인 스케르초''와 ''불꽃놀이'' 초연에 참석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독특한 화성 기법과 밝은 오케스트레이션에 매료되어 그에게 발레 Les Sylphides프랑스어를 위한 쇼팽 음악 편곡을 의뢰했다.
1910년,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불새를 소재로 한 첫 발레 불새를 작곡했다. 불새는 전음계와 옥타토닉 음계의 병치를 통해 주인공과 악당을 대비시키는 "리트-하모니" 기법을 사용했다.[1] 이 작품은 1910년 6월 25일 파리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클로드 드뷔시는 초연 후 스트라빈스키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두 작곡가 사이의 평생 우정이 시작되었다.
1911년에는 인형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담은 ''페트루슈카''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요제프 라너의 왈츠, 프랑스 뮤직홀 곡, 러시아 민요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활용하여 스트라빈스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슬라브 부족의 이교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무조성, 불규칙한 리듬과 악절, 중첩된 화성 등 아방가르드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초연 당시 거의 폭동에 가까운 사건을 일으켰다. 바실리 니진스키의 급진적인 안무와 더불어, 이 발레의 실험적인 성격은 1913년 5월 29일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초연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스트라빈스키는 이후에도 풀치넬라(1920), 결혼(1923), 뮤즈를 이끄는 아폴론(1928), 요정의 키스(1928), 카드놀이(1936), 오르페우스(1947), 아곤(1957) 등 다수의 발레 작품을 작곡하며 발레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향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교향곡을 작곡했다. 1907년에 교향곡 내림마장조 Op. 1을 발표했다. 1930년에는 시편 교향곡을 작곡했고, 1948년에 개정했다. 1940년에는 교향곡 다장조를 발표했다. 1945년에는 3악장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협주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다양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1923년부터 1924년 사이에 작곡된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1950년에 개정되었다. 1929년에는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으며, 1949년에 개정했다. 1931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라조를 작곡했다.
1928년부터 1929년 사이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를 작곡했다.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협주곡 '덤버튼 오크스'를 작곡했다. 1945년에는 에보니 협주곡을, 1946년에는 현악기를 위한 협주곡 D장조(바젤 협주곡)를 작곡했다. 1958년에서 1959년 사이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무브먼츠를 작곡했다.
'''실내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다양한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 1914년 현악 4중주를 위한 3개의 소품을 작곡했으며,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는 11악기 위한 랙타임을 작곡했다. 1919년에는 클라리넷을 위한 3개의 소품을 작곡했고, 1920년에는 현악사중주를 위한 콘체르티노와 관악 교향곡(1947년 개정)을 작곡했다.
1923년에는 관악 8중주를 작곡했으며, 1932년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 협주곡을 작곡했다. 1953년에는 7중주를 작곡했다. 1959년에는 플루트, 클라리넷, 하프를 위한 비명(碑銘)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이중 카논(라울 뒤피 추모곡)을 작곡했다.
'''피아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를 위한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올림 바단조(1904)와 4개의 연습곡 Op. 7(1908)이 있다. 1919년에는 피아노 라그 뮤직을 작곡했고, 1921년에는 다섯 손가락으로를 작곡했다.
그는 『페트루슈카』 3악장과 같은 발레 음악에서도 피아노를 중요한 악기로 사용했다. 1935년에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고, 1940년에는 탱고를, 1943년에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다. 피아노 소나타 제2번 C장조(1924) 와 C장조 세레나데(1925) 또한 그의 주요 피아노 작품이다.
'''합창'''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미사곡(1944-8), 칸타타(1951-2), 설교, 이야기, 기도(1961), 찬송 진혼곡(1966) 등을 작곡했다. 이 외에도 별들의 왕(1911-1912), 네 개의 러시아 농민 노래(1914-1917), 트레니 - 예언자 예레미야의 애가(1957-1958), 인트로이투스 등을 작곡했다.
'''가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907년 목신과 양치기 Op. 2와 목가를 작곡했다.[41][42]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에는 일본의 세 개의 서정시를 작곡했으며,[41][42] 1914년에는 프리바우트키를 작곡했다.[41][42]
1916년에는 고양이 자장가를, 1917년에는 세 개의 이야기를 작곡했다.[41][42] 1963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1965년에서 1966년 사이에는 올빼미와 고양이를 작곡했다.[41][42]
2021년 현재 스트라빈스키의 저작권은 소멸되지 않았으며, 음악 저작권 사용 허가 신청이 필요하다.[41][42]
3. 1. 오페라/무대 음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오페라, 발레 음악, 극음악 등 다양한 무대 음악 작품을 남겼다. 1914년에는 오페라 《밤에 우는 꾀꼬리》를 초연했으며, 1917년에는 이 작품의 주제를 사용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1918년에는 《병사 이야기》를 초연했다. 1927년에는 장 콕토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 왕》을 초연했고, 1948년에 개정했다. 1951년에는 《탕자의 방황》을 초연했다. 그 외에도 《여우》(1916), 《마브라》(1922), 《페르세포네》(1933), 《홍수》(1962) 등을 작곡했다.3. 2. 발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과의 협업을 통해 발레 음악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1909년 2월, 스트라빈스키의 ''환상적인 스케르초''와 ''불꽃놀이'' 초연에 참석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독특한 화성 기법과 밝은 오케스트레이션에 매료되어 그에게 발레 Les Sylphides프랑스어를 위한 쇼팽 음악 편곡을 의뢰했다.1910년,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불새를 소재로 한 첫 발레 불새를 작곡했다. 불새는 전음계와 옥타토닉 음계의 병치를 통해 주인공과 악당을 대비시키는 "리트-하모니" 기법을 사용했다.[1] 이 작품은 1910년 6월 25일 파리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클로드 드뷔시는 초연 후 스트라빈스키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두 작곡가 사이의 평생 우정이 시작되었다.
1911년에는 인형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담은 ''페트루시카''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요제프 라너의 왈츠, 프랑스 뮤직홀 곡, 러시아 민요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활용하여 스트라빈스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슬라브 부족의 이교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무조성, 불규칙한 리듬과 악절, 중첩된 화성 등 아방가르드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초연 당시 거의 폭동에 가까운 사건을 일으켰다. 바실리 니진스키의 급진적인 안무와 더불어, 이 발레의 실험적인 성격은 1913년 5월 29일 샹젤리제 극장에서의 초연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스트라빈스키는 이후에도 풀치넬라(1920), 결혼(1923), 뮤즈를 이끄는 아폴론(1928), 요정의 키스(1928), 카드놀이(1936), 오르페우스(1947), 아곤(1957) 등 다수의 발레 작품을 작곡하며 발레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3. 교향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교향곡을 작곡했다. 1907년에 교향곡 내림마장조 Op. 1을 발표했다. 1930년에는 시편 교향곡을 작곡했고, 1948년에 개정했다. 1940년에는 교향곡 다장조를 발표했다. 1945년에는 3악장 교향곡을 완성했다.1905년부터 1907년까지 교향곡 1번 변호장조 Op. 1을 작곡했다. 1930년에는 시편 교향곡을 발표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교향곡 하장조를 작곡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3악장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3. 4. 협주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다양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1923년부터 1924년 사이에 작곡된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은 1950년에 개정되었다. 1929년에는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으며, 1949년에 개정했다. 1931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라조를 작곡했다.1928년부터 1929년 사이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를 작곡했다.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협주곡 '덤버튼 오크스'를 작곡했다. 1945년에는 에보니 협주곡을, 1946년에는 현악기를 위한 협주곡 D장조(바젤 협주곡)를 작곡했다. 1958년에서 1959년 사이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무브먼츠를 작곡했다. 1958년과 1959년에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악장을 작곡했다.
3. 5. 실내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다양한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 1914년 현악 4중주를 위한 3개의 소품을 작곡했으며,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는 11악기 위한 랙타임을 작곡했다. 1919년에는 클라리넷을 위한 3개의 소품을 작곡했고, 1920년에는 현악사중주를 위한 콘체르티노와 관악 교향곡(1947년 개정)을 작곡했다.1923년에는 관악 8중주를 작곡했으며, 1932년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 협주곡을 작곡했다. 1945년에는 에보니 협주곡을 작곡했고, 1953년에는 7중주를 작곡했다. 1959년에는 플루트, 클라리넷, 하프를 위한 비명(碑銘)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이중 카논(라울 뒤피 추모곡)을 작곡했다.
3. 6. 피아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를 위한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올림 바단조(1904)와 4개의 연습곡 Op. 7(1908)이 있다. 1919년에는 피아노 라그 뮤직을 작곡했고, 1921년에는 다섯 손가락으로를 작곡했다.그는 『페트루슈카』 3악장과 같은 발레 음악에서도 피아노를 중요한 악기로 사용했다. 1935년에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고, 1940년에는 탱고를, 1943년에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다. 피아노 소나타 제2번 C장조(1924) 와 C장조 세레나데(1925) 또한 그의 주요 피아노 작품이다.
3. 7. 합창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미사곡(1944-8), 칸타타(1951-2), 설교, 이야기, 기도(1961), 찬송 진혼곡(1966) 등을 작곡했다. 이 외에도 별들의 왕(1911-1912), 네 개의 러시아 농민 노래(1914-1917), 트레니 - 예언자 예레미야의 애가(1957-1958), 인트로이투스 등을 작곡했다.3. 8. 가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907년 목신과 양치기 Op. 2와 목가를 작곡했다.[41][42]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에는 일본의 세 개의 서정시를 작곡했으며,[41][42] 1914년에는 프리바우트키를 작곡했다.[41][42] 1915년에서 1916년 사이에는 고양이의 자장가를 작곡했다.[41][42]1916년에는 고양이 자장가를, 1917년에는 세 개의 이야기를 작곡했다.[41][42]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는 4개의 러시아 민요를 작곡했다.[41][42] 1963년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1966년에는 올빼미와 고양이를 작곡했다. 1965년에서 1966년 사이에는 올빼미와 고양이를 작곡했다.[41][42]
2021년 현재 스트라빈스키의 저작권은 소멸되지 않았으며, 음악 저작권 사용 허가 신청이 필요하다.[41][42]
4. 작풍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대부분은 최소한의 루바토나 비브라토를 사용하여 짧고 날카로운 악절이 특징이다.[1] 그의 학생 시절 작품들은 주로 그의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과제였으며, 주로 러시아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다.[2] 그의 첫 세 개의 발레, ''불새'', ''페트루슈카'', 그리고 ''봄의 제전''은 그의 국제적인 명성의 시작과 19세기 스타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했다.[2][3]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종종 세 가지 작곡 시대로 나뉜다.[4][5] 신고전주의 시대(1920~1951년)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기법과 주제로 전환했다.[6][7] 그리고 렬렬주의 시대(1954~1968년)에는 제2 빈 악파 작곡가들이 개척한 고도로 구조화된 작곡 기법을 사용했다.[8][9]
스트라빈스키는 당대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과 협업했으며, 그중 다수는 그가 《불새》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후 만났다.[10][3] 디아길레프는 작곡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에게 무대 작곡을 소개하고 그의 초기 세 발레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 주었다.[11] 러시아 발레단과 디아길레프를 통해 스트라빈스키는 바슬라프 니진스키, 레오니다 마신,[3] 알렉상드르 베누아,[3] 미셸 포킨, 그리고 레옹 바크스트와 같은 인물들과 협력했다.[12]
작곡가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1917년에 만난 피카소와의 강한 유대감을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13] 이후 수년 동안 두 사람은 예술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친밀함의 표시로 소규모 예술 작품을 서로 교환했는데, 여기에는 피카소가 그린 유명한 스트라빈스키의 초상화[14]와 스트라빈스키가 그린 짧은 클라리넷 음악 스케치가 포함된다.[15] 이러한 교류는 《랙타임》과 《풀치넬라》에서 두 예술가가 어떻게 협업 공간에 접근할 것인지를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었다.[13][16]
스트라빈스키는 폭넓은 문학적 취향을 보였고, 새로운 발견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반영했다.[17] 그의 작품에 대한 텍스트와 문학적 원천은 민속인 러시아 민속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되었다.[18][19] 1914년 스위스로 이주한 후, 스트라빈스키는 수많은 자료에서 민담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나중에 《결혼 (레 뇌스)프랑스어》, 《레나르》, 《프리바우트키프랑스어》 및 다양한 노래와 같은 작품에 사용되었다.[20] 《불새》, 《레나르》, 《병정 이야기 (엘리스투아르 뒤 솔다)프랑스어》를 포함한 스트라빈스키의 많은 작품은 알렉산더 아파나시예프의 유명한 작품집 《러시아 민담》에서 영감을 받았다.[21][22][23] 민속 음악 모음집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영향을 미쳤으며, 《봄의 제전》의 수많은 선율은 리투아니아 민요 모음집에서 발견되었다.[24]
라틴 전례에 대한 관심은 스트라빈스키가 1926년에 다시 교회에 합류한 직후 시작되었으며, 1926년에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작곡된 그의 첫 번째 종교 작품인 《주님의 기도 (파테르 노스터)la》로 시작되었다.[25][26] 그는 나중에 오케스트라와 혼성 합창을 위한 그의 《시편 교향곡》에서 라틴 불가타의 세 시편을 사용했다.[27][28] 작곡가의 신고전주의 및 12음 기법 시대의 많은 작품은 전례 텍스트를 사용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했다.[26][29]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많은 작가들과 협력했다. 그는 1918년 《병정 이야기 (엘리스투아르 뒤 솔다)프랑스어》에서 스위스 소설가 샤를 페르디낭 라뮈와 처음으로 작업했으며, 그와 함께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텍스트를 작성했다.[30] 1933년 이다 루빈슈타인은 스트라빈스키에게 앙드레 지드의 시에 음악을 붙일 것을 의뢰했고, 이는 나중에 멜로드라마 《페르세포네]]/운율을 따르지 않는 것을 싫어했고 리허설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지드의 많은 아이디어를 무시했다.[32] 지드는 나중에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고 초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33] 《악당의 진보》의 이야기는 처음에 스트라빈스키와 W. H. 오든이 구상했으며, 후자는 체스터 칼먼과 함께 대본을 썼다.[34][35] 스트라빈스키는 T. S. 엘리엇,[17] 올더스 헉슬리,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그리고 딜런 토머스[36]를 포함한 많은 다른 작가들과도 친분을 맺었는데, 마지막 작가와는 1953년 오페라 작업을 시작했지만 토머스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37]
일생 동안 원시주의, 신고전주의, 음렬주의 등 작풍을 끊임없이 바꾸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카멜레온"[37]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초기 3곡의 발레 음악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은 유명하며,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참신한 음향과 복잡한 리듬을 사용한 러시아 민요풍의 에너지 넘치는 음악은 유럽 음악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7] 특히 원시주의 시대의 대표작인 『봄의 제전』은 전 세계 오케스트라에서 즐겨 연주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고,[16] 20세기 음악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38]
또한 오케스트라 작품에서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배운 관현악법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표현력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베를리오즈나 라벨,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마쓰다이라 요시아키는 저서 『현대 음악의 파사주』에서 "20세기 음악의 거의 모든 이디엄은 모두 그의 발상"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4. 1. 러시아 시기 (초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열정적이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선택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에게 화성과 대위법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대학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저명한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의 아들 블라디미르와 친구가 되었다. 1902년 여름, 스트라빈스키는 블라디미르와 함께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가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계속해서 레슨을 받도록 격려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는 대신 직접 작곡에 대해 조언하기로 했다.1902년 아버지의 사망 후,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예술가 그룹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주요 과제는 F#단조 피아노 소나타였고, 이후 E♭장조 교향곡을 작곡했다. 1905년, 피아노 소나타의 헌정자인 니콜라이 리히터가 이 곡을 연주하여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 초연되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대학이 폐쇄된 후, 스트라빈스키는 최종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반쪽짜리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그룹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현대 음악, 특히 프랑크, 뒤카, 포레(Fauré), 드뷔시(Debussy) 등의 프랑스 작곡가들을 접하게 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우는 데 시간을 보냈다. 1902년 8월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나기 전의 작품 중에는 "타란텔라"(1898), 가단조 스케르초(1902), "폭풍운"이 남아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다양한 작품의 편곡 작업을 맡겨 작품의 형식과 구조를 분석할 수 있도록 했다. 초기 작품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영향을 보여주며, 특히 대규모 중복 사용의 최소화와 다양한 음색의 조합에서 두드러진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E♭장조 교향곡(1907)이 글라주노프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고, "숲의 님프"(1907)의 모더니즘적 영향을 싫어했다.
러시아 작곡가들은 다양한 음색을 보여주기 위해 큰 관현악법을 사용했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초기 세 발레에서 이 아이디어를 활용했다. ''불새''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용한 leitmotif와 화성의 합성어인 "리트-하모니(leit-harmony)" 화성 구조를 사용했다. "리트-하모니"는 불새와 코슈체이 불멸자를 병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전자는 전음계 구절, 후자는 옥타토닉 음계 화성과 관련이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불새''를 작곡할 때 림스키-코르사코프에 대한 반항심으로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려고 했다.[1]
''페트루슈카''에서는 러시아 민요를 사용하여 러시아적 영향을 보여주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눈의 아가씨''의 민요를 사용하여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봄의 제전''은 아방가르드적 성격으로 인해 초연 당시 거의 폭동에 가까운 사건을 일으켰다. 다조성과 복잡한 악절, 상충하는 박자와 이상한 악센트를 결합한 구절이 특징이다. ''봄의 제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스트라빈스키는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스위스에 머물면서 러시아 민속 자료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2박자 또는 3박자는 스트라빈스키의 러시아 시대 음악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박자표가 자주 바뀌어 강세가 끊임없이 변화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민요시를 사용했다. 발레 칸타타 《》은 표트르 키레예프스키의 러시아 민요시 모음집을, 오페라 발레 《레나르》는 알렉산드르 아파나시예프가 수집한 민담을 바탕으로 했다. 그의 작품들은 동물 캐릭터와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은 독특한 연극 스타일을 사용했으며, 《레나르》에서는 목소리가 오케스트라에 배치되었다. 《병정 이야기》는 1918년 샤를 페르디낭 라뮤와 함께 작곡한 소규모 뮤지컬 극장 공연으로, 러시아 민담과 당시의 음악 구조를 혼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뿌리와의 음악적 연관성을 유지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초기에는 원시주의를 표방하지 않았지만, 주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부터 원시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3개의 발레 음악(『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대표적이며, 다성음악, 엇박자, 리듬 주제의 활용 등이 특징이다. 『결혼』을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향은 종식된다.[39]
4. 2. 신고전주의 시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전쟁 이후 스위스 거주지가 유럽 음악 활동과 멀다고 판단, 프랑스 카랑텍으로 이주했다. 1920년 9월, 코코 샤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초기 신고전주의 작품인 ''관악기 교향곡''을 작곡했다. 샤넬과의 관계가 불륜으로 발전한 후, 1921년 5월 다른 연인인 베라 드 보세가 있던 비아리츠로 이주했다. 베라 드 보세는 세르게 수데이킨과 결혼했지만, 나중에 이혼하고 스트라빈스키와 결혼했다. 스트라빈스키 부부는 작곡가의 이혼 거부로 인해 이혼하지 않았다.1921년, 스트라빈스키는 플레이어 피아노 회사인 플레이엘과 계약을 맺고 자신의 음악의 피아노롤 편곡을 제작했다. 그는 르 르슈슈아르 거리에 있는 그들의 공장에 스튜디오를 얻었고, 그곳에서 플레이어 피아노를 포함한 소규모 편성을 위해 ''''를 재오케스트레이션했다. 1924년에는 런던의 에올리안 사(Aeolian Company)와 또 다른 계약을 맺었다. 에올리안 사의 런던 지사가 해산된 1930년에 그는 플레이어 피아노 작업을 중단했다.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의 푸슈킨에 대한 관심은 1921년에 시작된 코믹 오페라 ''마브라''로 이어졌는데, 이 작품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타일을 거부하고 차이코프스키, 글린카 등의 고전 러시아 오페라 작곡가들에게로 방향을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1923년, 스트라빈스키는 네 대의 피아노를 포함한 타악기 편성으로 ''''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다. 6월에 러시아 발레단이 이 발레-칸타타를 상연했다. 이 기간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지휘와 피아노 연주 활동을 확대했다. 1923년 자신의 팔중주곡 초연을 지휘했고, 1924년 피아노 협주곡 초연에서 독주자로 활동했다.
1919년 디아길레프가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지 등)의 음악을 기반으로 한 발레 아이디어를 제안한 후, 발레 《풀치넬라》가 의뢰되었다. 후기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의 화성과 리듬 체계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통해 스트라빈스키는 18세기 음악으로의 전환을 시작했다. 음악학자 제러미 노블은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시대가 《관악기들을 위한 교향곡》으로 192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리스 신화는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였다. 그의 첫 그리스 신화 기반 작품은 발레 (1927)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오이디푸스 렉스》(1927), 《페르세포네》(1935), 《오르페우스》(1947) 등에서도 그리스 신화의 주제를 사용했다. 그의 8중주곡(1923)은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지만, 현대화했다. 바로크 대위법은 합창곡 《시편 교향곡》(1930)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재즈의 영향을 받은 《에보니 협주곡》(1945)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빅 밴드 편곡과 바로크 형식 및 화성을 융합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시대는 1951년 오페라 《장난꾸러기의 진보》로 끝을 맺었다. 이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4. 3. 음렬주의 시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영어에 익숙해지면서 윌리엄 호가스의 연작 그림 죄 많은 인생을 바탕으로 영어 오페라를 작곡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1947년 11월, 위스턴 휴 오든과 함께 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미국 작가 체스터 칼먼이 오든을 도왔다. 1951년, 스트라빈스키는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완성했다. 이 오페라는 널리 공연되며 성공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새로운 음악이 젊은 작곡가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로버트 크래프트는 ''죄 많은 인생'' 초연 직후 스트라빈스키에게 제2 빈 악파의 12음 기법을 소개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안톤 베베른과 아널드 쇤베르크의 음악을 연구하고 듣기 시작했다.1950년대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세계를 광범위하게 순회 공연을 계속했고, 가끔 작곡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1953년, 딜런 토마스가 쓴 대본으로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합의했지만, 그해 11월 토마스가 사망하면서 프로젝트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듬해에 12음 기법을 완전히 기반으로 한 그의 첫 작품인 ''딜런 토마스를 추모하며''를 완성했다. 1956년에 베니스 국제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된 칸타타 ''칸티쿰 사크룸/Canticum Sacrumla''는 북독일 방송/Norddeutscher Rundfunkde로 하여금 1957년에 트레니/Threnila의 음악적 설정을 의뢰하게 했다. 조지 발란신의 발레 ''아곤''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적 주제와 12음 기법을 융합했고, ''트레니/Threnila''는 음렬 사용으로의 그의 완전한 전환을 보여주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처음 고안한 12음 기법과 같은 연속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노블은 이 시기를 "스트라빈스키 음악 어휘의 가장 심오한 변화"라고 썼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로버트 크래프트를 만난 후 제2 빈 악파 음악에 대한 스트라빈스키의 새롭게 발견된 관심 때문이었다. 작곡가의 12음 기법 처리는 독특했다. 쇤베르크의 기법은 매우 엄격하여 음렬이 완료될 때까지 반복을 허용하지 않았던 반면, 스트라빈스키는 음표를 자유롭게 반복했고, 심지어 음렬을 세포로 분리하여 음표의 순서를 바꾸기도 했다. 또한, 그의 연속 기법 시대의 관현악법 스타일은 어둡고 저음이 강조되었으며, 관악기와 피아노는 빈번하게 가장 낮은 음역을 사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처음에 칸타타(1952), 세프텟(1953) 및 ''셰익스피어의 세 곡''(1953)과 같은 소규모 작품에서 12음이 아닌 연속 기법을 실험했다. ''In Memoriam Dylan Thomas''(1954)는 이러한 기법을 기반으로 한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아곤''(1954–1957)은 12음 음열을 포함한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고, ''칸티쿰 사크룸la''(1956)의 2악장은 음렬을 기반으로 한 악장을 처음으로 포함한 작품이었다. ''아곤''의 독특한 음조 구조는 스트라빈스키의 연속 음악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디아토닉으로 시작하여 중간에 완전한 12음 연속주의로 이동한 다음, 마지막에는 디아토니시즘으로 돌아간다.
스트라빈스키는 ''칸티쿰 사크룸la'', ''트레니la''(1958), ''설교, 이야기 그리고 기도''(1961), 그리고 ''대홍수''](1962)와 같은 작품에서 신성한 주제로 돌아왔다. 스트라빈스키는 이전 작품의 여러 개념을 그의 연속 작품에 사용했다. 예를 들어, ''대홍수''에서
5. 한국과의 관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959년 4월부터 5월까지 로버트 크라프트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44] 원래는 문화자유회의의 니콜라스 나보코프가 기획한 도쿄 세계 음악제 참가가 목적이었으나, 음악제는 1961년으로 연기되었다.[45]
스트라빈스키는 일본 방문 기간 동안 다양한 일본 전통 예술을 접했다. 가마쿠라의 고토쿠인(高徳院) 대불(大仏)을 관람하고, 가부키자(歌舞伎座)에서 「칸진쵸(勧進帳)」를 관람했다.[44] 교토에서는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료안지(龍安寺), 이시야마데라(石山寺), 슈쿠가쿠인 릿큐(修学院離宮), 고산지(高山寺), 케이린큐(桂離宮), 산포인(三宝院), 뵤도인(平等院), 니조성(二条城), 난젠지(南禅寺)를 방문했다. 오사카에서는 노(能)와 분라쿠(文楽)를 관람했고, 나라와 고베에도 방문했다.[44]
4월 10일에는 호텔 TV로 상황(上皇明仁) 황태자 결혼식 퍼레이드를 시청했다.[44] 5월 1일에는 오사카 국제 페스티벌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 「페트루슈카」 일부, 「불꽃놀이」, 「불새」(1945년판)를 연주했다.[44] 5월 3일과 7일에는 히비야 공회당(日比谷公会堂)에서 도쿄 공연을 했다.[44] 5월 4일에는 고쿄(皇居)에서 가가쿠(雅楽)를 관람했다.[44]
이 방일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NHK(일본방송협회)에서 다케미쓰 도루(武満徹)의 「현악을 위한 레퀴엠(弦楽のためのレクイエム)」 테이프를 듣고 그를 극찬했다.[47] 이 곡은 과거 야마네 긴지(山根銀二) 등에게 혹평을 받았던 작품이었으나,[46] 스트라빈스키에게 인정받은 것을 계기로 타케미츠의 평가는 국내외에서 급상승했다.[47] 스트라빈스키는 일본의 다양한 전통 예술 중에서도 특히 「친돈야(チンドン屋)」에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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